프로젝트

말 달린 발 [동백꽃 지다: 1.항쟁의 뿌리]

말 달린 발 [동백꽃 지다: 강요배]

하루 만의 제주 4∙3 여행길

2019.05.25(토)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 한 사람,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순이삼촌』

제주 4∙3은 6∙25 전쟁 다음으로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다. 제주의 거의 모든 지역이 제주 4∙3과 관련된 장소이므로, 모든 장소를 답사하려면 일 년도 부족할 것 같다. 다음의 장소는 제0세계가 하루 만에 방문한 제주 4∙3 유적지이다.  

제주시 화북동 서쪽 바닷가에 위치한 약 70여 호 규모로 늘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서 곤을동이라고 한다. 1949년 1월 4일 군경 토벌대에 의해 초토화되면서 복구되지 못한 ‘잃어버린 마을’  이다. 불시에 들이닥친 토벌대에 의해 가옥이 전소되고 많은 주민이 희생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제주시 인근 해안마을이지만 ‘잃어버린 마을’1)의 상징이 된 이곳에는 지금도 집터, 올레(집과 마을 길을 연결해주는 작은 길) 등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올해 4월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성공리에 막을 내린 ‘잃어버린 마을:동혁이네 포차’의 배경이기도 하다. 

1) 잃어버린마을 | 1948년 11월 이후 중산간 마을이 토벌대에 의해 초토화되면서 주민들이 마을을 떠난 후 현재까지 복구되지 않은 마을을 말한다. 당시 주민들이 참혹한 광경이 떠올라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면서 고향 마을마저 사라져 버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카페와 전원주택, 타운하우스가 들어서면서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제주 4∙3평화공원은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2) 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제주 4∙3평화공원에는 4∙3의 발발, 전개, 결과, 진상규명 운동까지 전 과정이 보기 쉽게 차례로 전시되어 있다. 또한 희생자를 기리는 위패 봉안실, 제주 4∙3 유해사업 발굴에 의해 발굴된 유해를 모셔놓은 봉안관, 아직도 찾을 수 없는 희생자를 기다리는 행방불명의 표석, 지역벌 희생자들의 이름과 성별, 당시 연령이 적혀있는 각명비원 등이 있다. 

우리는 미리 신청해 놓은 도슨트의 설명을 듣고 당시 기획 전시였던 홍성담의 5∙18 그림책 <운동화 배행기> 원화전을 관람하였다. 이후 위령봉안실과 위령광장에 다녀온 후, 우연찮은 기회로 현재 제주 4∙3문화해설사 현수종(제주상록봉사단 회장) 유족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2)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 2003년 10월 그 내용이 확정되었으며,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에 의해 작성되었다. 현존하는 제주 4∙3 관련 조사문건 중 가장 사실에 가까운 문헌이다. 

무장대의 훈련장으로 정물오름과 다래오름을 연결하는 무장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오름 정상에 올라보면 대정면 지역부터 제주시 지역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한림면 무장대의 거점이자 서부지역의 활동 근거지였다는 사실은 이런 지리적 조건과 관련이 있다. 

한림읍 월령리에는 무명천 할머니로 알려진 진아영 할머니의 생가가 있다. 이곳은 제주 4∙3사건의 민간인 희생자의 궤적을 되새길 수 있는 곳이다. (고)진아영 할머니는 제주 4∙3의 생존 피해자였다. 생존피해자 중에는 후유 장애인으로 분류되는 분들이 있다. 진아영 ‘무명천 할머니’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턱을 감추기 위해 천을 머리에 동동 메고 평생 사셨기 때문에 ‘무명천 할머니’로 불렸다. 그녀는 턱이 없었다. 1949년 추운 1월, 35살의 나이에 함경면 판포리 집 앞에서 경찰이 무장대로 오인해 발사한 총에 맞아 턱을 잃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없었고 평생을 말을 할 수도 없고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며 살다가 2004년 9월 8일 향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혈족이 없던 할머니의 집터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2007년 할머니를 잊지 않고자 하는 시민들이 모여 ‘삶터 보존회’를 만들고 할머니의 터전을 박물관으로 정비하였다. 소박한 할머니의 생활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간으로 보존하였으며, 일반인들이 찾아올 수 있는 공간으로 개방하였다. 현재는 민간 차원에서 ‘삶터보존회’를 꾸려 자원봉사 활동 등을 펼쳐오고 있다.

제0세계는 당시 예술공간 민에서 진행되었던 제26회 4∙3문화예술축전 예술아카이브프로젝트 <4∙3 기억투쟁예술타임라인>展을 관람하는 것으로 답사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한 곳 더 추천하자면!

섯알오름은 피해의 역사가 일제강점기부터 제주 4∙3 그리고 6.25 이후까지 엮여있다. ‘섯알오름 탄약고 터’는 일본군이 1944년 말부터 알뜨르 지역을 군사 요새화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일본군 탄약고가 있었던 자리이다. 당시 일본군은 야트막한 섯알오름의 내부를 전부 파내어 탄약고로 사용했으며, 탄약고 위쪽 오름 정상 부근에는 두 개의 고각포진지를 만들었다. 이 탄약고는 일제가 패망하면서 미군에 의해 폭파됐다. 이때 오름의 절반이 함몰되면서 큰 구덩이가 만들어졌고 고각포진지 하나도 같이 폭파되어 사라져버렸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내무부 치안국의 지시에 따라 모슬포 경찰서에 344명을 예비 검속하였다. 이렇게 예비 검속된 주민 중 계엄사령부에 송치된 252명을 같은 해 7월과 8월에 법적 절차 없이 총살하고 암매장한 장소이다. 현재는 위령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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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자료는 박선영의 리서치 내용을 기반으로 재작성한 것입니다. 

우리는 왜 제주 4∙3이 생소한가?

1982년 초판 발행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제주도 폭동사건은 북한공산당의 사주 아래 제주도에서 공산 무장폭도가 봉기하여, 국정을 위협하고 질서를 무너뜨렸던 남한 교란작전 중의 하나였다.”라고 적고 있었다. 1990년에 개정 초판이 발행된 교과서 역시 ‘제주도 폭동사건’이 ‘제주도 4∙3사건’으로 용어 하나만 바뀌었을 뿐 그 내용을 마찬가지였다. 이후 1996년 국사교과서는 또다시 개정되어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까지 희생되었으며 (…) 공산주의자들은 5∙10 총선거를 전후해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구실로 남한 각지에서 유혈사태를 일으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발생한 제주도 4∙3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10 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하여 일으킨 무장 폭동으로서… 제주도 일부 지역에서는 총선거도 실시되지 못하였다.”라고 기록한다.1)

교육과정이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 국가가 기준을 정해 놓은 것이다. 제0세계 팀원은 모두 7차교육과정을 이수하였다. 7차 교육과정(2002) 시기 중학교의 경우 국사를 독립 교과목에서 사회 과목 일부로 통합하고 주당 수업시간이 감소하였다. 그리고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조선 후기까지의 내용만 필수였으며, ‘한국 근현대사’라는 과목을 개설하면서 이 후 시대는 선택 과목으로 바뀌었다. 

박선영 작가는 7차 교육과정에서 근현대사(고등학교) 교과서 내용 중 제주 4∙3 부분을 조사하였다. 다음은 작가의 자료를 재편집한 것이다.

*김종민(전 4∙3위원회 전문위원)은 교과서 내용 중 제주 4∙3부분을 작성한 집필자와 인터뷰를 하였다. 1982년 집필자는 “내가 글을 쓸 때는 새로운 자료가 없어서 예전 자료를 인용하는 수밖에 없었다.”면서 “의식이 잘못된 원인이 뭐냐면, 그 때는 모두들 이데올로기 문제 때문에..”라고 답했다. 1990년판 집필자는 “원래 내 전공은 일제시대사인데 어쩌다 보니 현대사 부분까지 담당하게 됐다. 그 쪽(제주 4∙3)에 대해선 공부를 많이 못해서 다른 분들의 글을 참조하는 정도였다.”라고 말했다.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②』은 말한다(전예원,1994), 409~415쪽

전국 초기의 국내 정세
광복 이후 우리 민족의 염원이던 통일 국가의 수립은 미∙소의 대립, 좌익과 우익의 대립에 의하여 실현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남한에서나마 자유로운 민주 국가의 수립이 필요하였고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으로 나아갔다. 
남한만의 선거가 결정되자 좌익 세력은 전국적으로 파업 시위, 소요 폭동 등을 통하여 단독 선거 반대 운동을 벌였다. 1948년 4월에 제주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10 총선거를 방해하고자 소요 사건을 일으켰다. (제주도 4∙3 사건) 이 사건으로 제주도에서는 공산주의자로 구성된 유격대와 군∙경찰 극우 청년 단체 등으로 구성된 토벌대 사이에서 많은 양민이 희생당하기도 하였다. 

단독 정부 시립에 대해 가장 격렬한 반대 투쟁이 일어난 곳은 제주도였다. 1948년 4월 3일 단독 정부 수립 반대와 미군의 즉시 철수 등을 주장하는 제주도의 공산주의자와 일부 주민들은 무장 봉기하여, 도내의 관공서와 경찰지서를 습격하였다. (제주도 4∙3 사건) 이들은 무장 유격대를 조직하고, 한라산을 근거지로 하여 경찰 및 군인들과 전투를 계속하였다. 그 결과 제주도의 3개 선거구 중 두 곳에서는 총 선거가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들 지역의 선거는 1년이 지나서야 비로서 시행될 수 있었다. 미 군정과 새로 들어선 정부는 군인과 경찰, 우익 청년 단체들을 동원하여 유격대를 진압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만 명의 제주도민들이 함께 희생되었다.

제주도 4∙3 사건
대한 민국 정부의 수립을 전후하여 대규모의 유혈 사태가 잇따라 발생하였다. 제주도에서는 1948년 4월 3일에 좌익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도민들이 경찰 지서를 습격하는 무장 폭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미군 철수, 단독 선거 절대 반대, 경찰과 테러 집단 철수 등을 주장하였다.
제주도 4∙3 사건의 배경에는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좌익 세력의 활동, 군정 경찰과 서북 청년단에 대한 반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1947년 3∙1절 기념 시위가 벌어졌을 때 군정 경찰의 발포로 희생자가 발생하자 제주도민들은 이에 항의하여 파업을 단행하였다. 이에 대해 미 군정 당국이 군정 경찰과 서북 청년단을 추가로 파견함으로써 제주도민과 군정 경찰 및 서북 청년단 사이에는 대립과 갈등이 증폭되었다. 
미 군정은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의 군대, 경찰, 청년단을 증파하였다. 여기에 맞선 주민들은 한라산으로 들어가 인민 유격대를 조직하고 대항하였다. 이에 제주도 일부 지역에서는 5∙10 총선거가 실시되지 못하고 연기되었다. 토벌 작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대규모의 유혈 사태가 빚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도 많이 희생되었다.

1947년 제주도에서 3∙1절 기념식을 마치고 시가 행진을 하던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주민들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면서 총파업을 벌이며 항의하였다. 그런데 군정 당국은 민심을 수습하기보다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을 소탕한다는 명분 아래 수천 명의 일반 주민들까지 투옥함으로써 주민들의 반감을 샀다. 1948년 제주도 4∙3 사건이 일어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미군정은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감시하에 1948년 5월 10일 38도선 이남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이 선거에는 김구, 김규식 등이 참여를 거부함에 따라 이승만 한국 민주당 등이 참여하였다. 제주도에서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도민들의 궐기를 4∙3 사건이 발생하여 선거가 실시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48년 4월 3일에 제주도의 좌익 세력들이 미군 철수, 단독 선거 반대 등을 주장하며, 도내의 경찰 지서와 우익 단체를 공격하였다. (제주도 4∙3사건) 미 군정청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군대와 경찰을 파견하였는데, 진압 과정에서 많은 무고한 주민이 희생되었다. 이에 제주도 일부 지역에서는 5∙10 총선거가 실시되지 못하고 연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