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release

87년생이 바라본 '제주 4·3'은? '동백꽃피다' 전

김호정 | 서울특별시 시민기자

서울시에서는 청년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매년 최초예술지원사업을 연다. 그 중 청년예술단은 젊은 예술가들이 팀을 이루어 시의성 있는 주제로 전시나 공연을 만든다. 올해 선정된 팀 '제 0세계'는 '제주 4.3'을 주제로 프로젝트 결과를 공유하는 전시를 한다. <동백꽃 피다>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지난 10월 1일 오픈해 오는 22일까지 영등포구에 위치한 '쇼앤텔'에서 진행 중이다. 60년대에 태어난 나에게도 생소하여 불편했던 제주 4.3을 87년생 청년들은 과연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어릴 적 나에게 제주도는 아주 먼 곳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귤이 재배되는 곳이었고, 인기 있는 신혼여행 관광지였으며, 아름다운 풍경의 꼭 가보고 싶은 여행지였다. 내가 기억하는 ‘제주 4.3 사건’은 고등학교 국사 시간 교과서에 있던 한라산 배경의 사진 한 장과 ‘공산당에 의한 폭도들의 반란’이라는 문장이 전부였다. 그 짧은 문장과 나의 무관심이 더해져 사는 동안 제주 4.3사건은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우리 현대사 속의 많은 사건들이(4.19, 광주 5.18민주화 운동) 재조명되고 진실이 하나 둘 씩 밝혀지는 과정을 통해 그 동안의 역사가 권력자들에 의해 뒤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제주 4.3 사건 역시 내가 배웠던 내용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지만 제주도라는 물리적인 거리감 때문인지, 6.25사변 전에 일어났던 이념갈등 정도로 치부해서인지 다른 나라 이야기인 것처럼 기억에 깊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전시장 입구에 <동백꽃 피다>라는 전시 제목과 활짝 펴 있는 동백꽃의 포스터를 보고 ‘그래도 우리는 꽃을 피운다’라는 강한 저항의 메시지를 느끼며  전시를 보았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이 내용과는 연관성이 없을 것 같은 ‘극락왕생’이라는 글자가 크게 눈에 들어왔다. 타이포그라피로 작업된 글자는 마치 한라산의 등고선처럼 보였고 이전에 교과서에서 봤던 사진과 오버랩 되었다. 산으로 올라간 무장대와 불태워진 중산간 마을, 그 사이 무고하게 희생된 많은 사람들. 이 사건은 제주도를 상징하는 한라산에서 일어난 일이다. 작품 구석에 있던 민어 한 마리가 제사상을 연상시키며 부디 극락왕생하길 바라게 된다.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들 모두 좋은 곳으로 가셨길. 그러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희생자들에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순출 삼촌’이라는 유족의 모습을 모티브로 한 영상 작품은 낯설게 다가왔다. 내가 기대하고 예상한 유족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얼마나 그들을 무겁게만 바라보고 있었는지,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과 고정 관념을 정면으로 맞서게 해 주었다. 영상 속에서는 마음씨 좋은 옆집 할머니가 손녀딸과 장난처럼 꽃단장하는 모습을 위트 있게 만화의 기법으로 표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작품에서 유족에게서 예상했었던 어둠과 고통의 모습을 찾기 위해 영상 속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검은색 굵은 터치의 의미를 물었다. “단순히 인물을 강조하기 위한 반사판 같은 거예요”라는 작가의 대답에서 그의 의도가 느껴졌다. 그들은 그저 내 옆집의 할머니, 할아버지인 듯 하다.그들을 4.3 유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가두어 놓고 무겁게 바라본 것은 나 자신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아픔을 귀담아 듣기도 힘들어하고, 가까이 하기에도 부담스러워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자 그들을 나와 상관없는 멀리 있는 다른 나라 사람 이야기쯤으로 치부해 덮어버리고 싶은 내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작가는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 본 것 같다.

‘섬의 얼굴’이라는 유족들의 얼굴을 그린 작품은 유족들에게 위로를 주는 작품이라고 느껴졌다. 유족들 중에는 부모님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는 분들도 많다고 들었다. 그들의 초상화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어쩌면 희생자들의 초상화도 이와 많이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족들의 초상화라면 무채색의 수묵화나 연필스케치를 사용해서 그렸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작가는 반대로 화려하고 밝은 색상 위주의 수채화를 사용했다, 유족들의 힘들고 굴곡진 삶과 대조를 이루는 예쁜 색깔의 물감들이 마치 우는 아이들을 달래주는 과일맛 사탕처럼 그들을 달래주고 있는 것 같았다. ‘물감이 물에 의해 풀어지듯 당신들의 응어리진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라고 속삭이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비 시리즈 작품’은 희생자의 방대함과 우리의 무관심과 방치를 꾸짖고 있었다. 고백하자면 여러 번 제주도를 여행 했지만 한 번도 기념관이나 4.3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외국 여행을 계획할 때면 항상 그 지역의 역사에 큰 관심을 갖는데 제주도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그 당시 제주도 도민의 10분의 1이 희생되는 엄청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오랜 세월 무관심과 권력의 폭력 속에서 유족들은 더 쓰라리고 아팠을 것이다. 그림 속의 백비 앞에서 나의 무관심에 반성했다.

이 전시회는 무겁고 아프다고 기억 안쪽에 묻고 잊으려는 나의 한계를 직면하는 기회였다. 앞으로 이와 같이 젊은 작가들의 참신한 발상과 표현을 통해 많은 우리의 역사 속 아픈 과거를 어루만지고 살피는 전시를 더 보고 싶다. 고령인 유족들을 보면 우리에겐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는 잉크처럼 지워지지 않도록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방법으로 계속 덧칠을 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2019년 이곳 서울에서 우리의 기억을 소환해준 <동백꽃 피다>의 4명의 젊은 작가와 그들을 후원해준 서울시가 고맙다.

극복의 이야기 제주도 4.3

윤종표 | 서울시민

이제는 온몸으로 노래하며
떨어지는 꽃잎들

사랑하면서도 
상처를 거부하고
편히 살고 싶은 나의 생각들
쌓이고 쌓이면
죄가 될 것 같아서

마침내 여기 
섬에 이르러 행복하네요

 좋아하는 시인의 ‘동백꽃이 질 때’라는 시의 구절인데 마지막에 왜 시인이 ‘섬’에 가고 싶었는지 궁금해 왔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자문하던 질문인데 그 때마다 답이 다르거나 답하는 것을 잊곤 하였다. ‘동백꽃이 피다’라는 전시는 팀 ‘제 0세계’가 제주도4.3을 주제로 한 전시 프로젝트라 하는데, 왜 하필 전시제목이 ‘동백꽃’인지, 또한 거의 대부분의 경우 동백을 주제로 예술행위를 하면 작가들은 그 꽃의 봉우리가 절정인 순간에 툭 떨어져 버리는 ‘처연함’에 주목하는데 왜 이들은 반대로 ‘피어남’에 주목했는지 전시를 보기 전부터 궁금했다. 
 전시장에 들어가니 ‘극락왕생’네 글자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다. 물고기는 제사상에 오르는 민어란다. 선으로 이어진 극락왕생의 네 글자는 등고선으로 연결된 제주도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한데, 신기한 건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누군가 내 귀에다 대고 ‘극 락 왕 생 극 락 왕 생’ 말하는 듯 했다. 이건 작품이 지닌 힘이기도 할 텐데, 생각해 보니 그 목소리가 작가의 것인 것 같기도 했다. 목소리는 머릿속을 어지러이 맴돌아 끝에는 ‘미 한 해 요 미 안 해 요’라는 잔음을 남겼는데, 누구에게 뭘 미안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대충 생각해 보면 그 미안함이 4.3의 희생자들, 그들의 가족, 같은 공간속에서 아무것도 못했을 당시 제주도주민들, 그 슬픔을 덮어준 세월에 대한 것인가 했는데, 하지만 이곳의 작품들은 그분들이 보라고 이곳에 걸려있는 것은 아니므로 그들에게 미안한 것은 아닌 듯싶다. 생각을 고쳐 해보면 그 미안함은 우리들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미안해 할만도 하다. 이제 우리는 제주도4.3을 알지 못했던 그 시절로는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서, 엄청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4.3을 그리도 모르고 살았다니 참으로 그 무지의 시절에 얼굴이 붉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식이 약이라고 그 시절이 속편하고 좋지 않았나 싶다. 그냥 살았으면 됐으니까.  그러나 이제 우리는 제주도 4.3을 알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두 알게 되었다. 이런 우리가 과연 행복할 자격이 있는 것인가? 그래서 가슴아파할 우리네에게 미안하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우리에게 극락왕생이 가당키나 할까? 작가의 미안함은 결국 모든 걸 알아버린 우리를 향하는 듯하다. 모두 극락왕생하여 물고기로 환생하시길. 누군가 또 귀에 대고 말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담고 몸을 돌려 마주한 작품 ‘백비’인데, 작품에서 보여주는 기억의 멀어짐과 옅어짐은 세월의 마술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세월은 망원경과 같아서 아주 멀리 있는 것도 당겨보는 마법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주변 것들을 놓치는 단점도 있다. 제주도4.3을 대하는 그동안의 태도는 피해자들이 겪었던 비극적 경험, 남은 자들의 슬픔, 정리되지 못한 응어리에 집중되었다. 결국 1947년에서 별로 나아간 것이 없다. 하지만 세월은 계속 흘렀고 4.3피해자들의 삶도 계속되었다. 작품은 오로지 과거기억의 초점만 기억하는 우리의 태도를 탓하며, 제주4.3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비극과 슬픔이 있었는지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몸으로 겪고 이겨내야만 했지만 결국 초점의 주변부에 머물러야만 했던 피해당사자들의 4.3이후의 삶도 중요하다 말하고 있다. 

사실 전시를 보기 전 약간의 선입견(?)도 있었는데 그것은 그동안 제주4.3을 주제로 한 이러저러한 작품, 전시, 영상, 무대극 들이 관객들의 감정을 짓누르거나, 혹은 강요하거나 아님 이념적으로 한쪽에 치우쳐 있거나 해서 이미 마음속으로는 약간의 준비를 하고 전시 작품들을 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전시장에서 마주한 작품들은 그러한 나의 예상과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어 아주 반가웠다. 특히 순출삼춘이라는 드로잉과 영상을 혼합시켜 놓은 작품이 그러했는데, 이 작품이 제주도4.3을 주제로 한 것이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할머니가 4.3의 피해자임을 몰랐다면, 영상 속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작가와 마치 할머니와 손주딸의 관계인 것처럼 재미있게 노시는 듯싶었다. 사실 이런 모습이 진정한 제주도4.3을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누가 왜 어떻게 제주도4.3의 슬픔을 원인 지었는지 명백히 밝히고 단죄하고 사죄하고 용서해야 할 것은 용서하는 절차 및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겠지만, 이제는 그 너머까지 바라봐야 할 때라고 생각해 왔다. 정권의 색깔에 따라 묻히거나 아님 깃발위에 서있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고 치유하려는 제주도4.3의 피해당사자들의 모습을 똑바로 봐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해 왔다. 제주도4.3의 상처를 온전히 안고 그럼에도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살아가야한다는 생존의 잔인함을 이겨내야만 했던 피해당사자들의 긴 호흡의 슬픔을 보듬고 존중해야할 때가 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순출삼촌속에서의 할머니는 웃음이 밝고 표정이 맑았다. 제주도4.3을 주제로 했음에도 무게와 공포를 옆으로 밀어버린 채 작품속 선들은 붓질이 경쾌하고 꺽임이 격하지 않다. 순출삼촌뒤에는 제주도4.3을 직접 경험하신 분들의 초상화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같은 작가의 작품이었다. 초상속의 표정들은 제각각이었지만 나에게는 표정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일까 궁금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순출삼촌의 모티프와 비슷한 것 같다. 순출삼촌속의 할머니나 초상화속의 그분들은 엄청난 비극을 겪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분들의 슬픔을 보듬지 않았고, 그래서 스스로 이겨내고 견뎌내야만 했다. 체념과 분노, 명분과 현실, 그리움과 미안함, 그 모든 것이 현재의 삶과 얽히고설켜 어떤 것에도 치우칠 수 없는 삶의 경계에서 그분들의 선택은 그리 많았을 것 같지 않다. 과연 어떤 표정을 지어야만 했을까? 어떤 결의 삶을 살아야만 했을까? 딱딱하게 덩어리진 그 분들의 삶을 우리들의 입맛대로 제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가의 작품들 속에서 그런 나의 바램을 보았다. 그래서 좋았다.
 엄청난 세월이 지난다음에야 온몸으로 노래하며 떨어지는 동백꽃잎들처럼 그분들의 덩어리진 슬픔이 떨어져 내리기를 바란다. 또한 이제는 그곳에서 꽃이 피기를 바란다. 사랑하면서도 기억의 상처를 거부하고 편히 살고 싶은 나의 생각들이 밉기도 하겠지만 이제는 그만 그 미움이 쌓이고 쌓이면 죄가 될 것 같아서 마침내 여기 섬에서 행복하자. 시인이 왜 그리 말했는지 오늘은 알 것만 같고, 이들의 전시이름이 ‘꽃이 지다’가 아니라 왜 ‘동백꽃 피다’인지도 알 것만 같다.

두 개의 세상과 그 사이의 사람들

박민희 | 독립기획자, 마음의시력

"이게 나라냐?" 피켓을 들고 정권을 바꾼 게 엊그제 같은데, 이번에는 나라가 두 동강이 났다. 아니, 이미 두 동강 난 나라인데 세 동강 난 것인가? TV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나는 서초동에도 광화문에도 속해 있지 않은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을 느꼈기 때문이다.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상류층의 특권을 무작정 덮어주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데. 섣불리 이렇다 저렇다 말 못하고 있으니 회색분자가 된 느낌. 자책감이 스치고 마음 한 켠이 답답한 와중에 반가운 캠페인이 있었으니, 녹색당의 '서초동과 광화문 사이'에서 '나는 나의 깃발을 들겠습니다' 연재 기사였다. 안도했다. 나같은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해주어서 고마웠다.

 10월 4일, 나는 영등포구에 있었다. 전시 오프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제주에서 만나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예술인들이 '제주4.3'을 중심으로 팀을 만들고, 반 년 동안의 활동 내용을 다듬어 전시를 개최했다. 쇼앤텔에서 진행 중인 '제0세계' 프로젝트 결과공유전시 <동백꽃 피다>가 바로 그것이다.

올 해는 제주4.3 71주년이다. 하지만 반도의 남쪽은 71년 동안 여전하다. 낮과 밤, 오른쪽과 왼쪽, 두 개의 세상만 존재하는 듯 보인다. 사이의 사람들은, 기록되지 않는 사람들은 역사적 의미가 없는 걸까. 서초동도 광화문도 아닌 곳에서 조용하게 쌓아 올린, 작은 바람에도 허탈하게 흩날려버릴 꽃잎들을 보기 위해 '사이'에서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일상에서 지하철을 타지 않는 터라(도시를 벗어나 살고 있다) 오랜만에 마주한 퇴근시간 9호선은 정말 힘들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사전 공지되었던 오프닝 시간 7시가 지나자 마음이 조급했다. 행여나 어떤 장면과 말들을 놓칠까 부지런히 움직였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했을 때의 안도감. 오프닝에 맞춰진 작가와의 대화 라든지, 모두가 기획자의 말을 경청하는 그런 광경은 없었다. 네 명의 작가들은 관객에게 둘러 쌓여 있었지만, 익히 보아왔던 하나의 큰 원이 아닌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모이고 흩어지는 작고 일시적인 원이었다. 누구 하나 같은 시간에 몰려 오지 않았으므로, 작가와의 대화와 기획자의 말은 늦은 9시까지 지속되었다. 

관객들은 전시를 보고 전시 공간 외부에 준비된 작은 다과회에 참석해서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대화를 나눴다. 아, 오프닝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보통 전시 개막 행사는 잘 기억나지 않는 말 잔치를 하고,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누다가 급히 식사(?) 장소로 이동하기 때문에 관람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동백꽃 피다>의 오프닝은 신선했다. 작품을 충분히 관람할 수 있었고, 작가들과 깊게 대화 나눴으며, 전시 공간에서 오랜 시간 머물 수 있었다. 신선한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인사를 나누는 관계자들이 모두 20, 30대의 젊은 층이었다는 것. 기성 제도를 경험하며 불편했던 것들을 개선하고자 했거나 혹은 주어진 환경을 섬세하게 고려하여 기획된 아주 작은 시도가 천천히 조용하게 마음에 닿았다.

'제0세계'를 기획하고 현재 구성원들에게 참여를 제안한 박선영 작가는 예술공간 이아(아래 이아) 레지던시(제주)에 입주했을 때 4.3을 처음 접했다. 그 때가 2017년이니, 벌써 3년 전이다. 이후 작년 '4.3 70주년 해원상생큰굿' 현장에서 고승욱 박정근 작가와 함께 4.3유족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옛날사진관>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유족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 나눴던 일주일 간의 경험이 감정의 변화를 일으켰고, 초상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4.3유족 초상화 시리즈 작업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고 26회 4.3미술제 <경야>(2019, 제주), <섬의 얼굴>(2019, 서울), <100 마이너스 30>(2018, 제주), <섬의 얼굴>(2019, 제주)에서 다양한 변주로 전시되었다. 스케치도 없이 일필휘지로 그려 넣은 유족들의 얼굴에는 생명력이 가득하다. 잘 섞이지 않을 것 같은 다양한 원색들이 서로 어울려 감탄을 자아낸다. 특히 이번 전시에 처음 발표된 "순출삼촌" 드로잉 영상은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는 매력이 있다.

평소 '초상화'와 '기억'을 매개로 작업을 해왔던 김준한 작가는 겹겹이 배접된 한지 위에 그림을 그린다. 이후 그 '겹'들을 분리해서 전시 중이다. 당연하게도 붓이 직접적으로 닿았던 층의 이미지는 선명하고, 아래 층으로 갈수록 희미해진다. 관객이 처음 마주하는 작품들은 가장 흐릿한 그림들인데, 처음엔 '추상화'라고 생각했다. 한 걸음씩 내딛을 수록 점점 선명한 이미지가 등장하고, 이내 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참 탁월한 구성이다. 경험과 기억의 성격을 명쾌하고 직관적으로 알게 해준다. 아픈 역사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형광, 핑크색들로 4.3평화기념관의 '백비'를 그렸다.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장치다.

제0세계의 특징 중 하나는 작가 뿐만 아니라 아키비스트와 디자이너가 함께한다는 점이다. 기획자 김유민은 제0세계 아키비스트 역할을 맡아 프로젝트의 과정을 기록했다. 김유민이 발간한 <모호한 담론>은 "우리는 왜 제주 4.3이 생소한가?" 질문으로 시작되는데,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서 그 답을 찾으려는 시도가 흥미롭다. 7차 교육과정 속에 제주4.3이 어떻게 언급되고 있는지 살펴본 것이다.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이지만, 제도권에서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았다. 교과서를 통해 역추적해 보는 우리 사회는 여전히 '빨갱이'와 '토벌대', '산 사람'과 '서북청년단' 두 개의 세계로 나뉘어져 있다.

제0세계의 4인은 모두 87년생으로 '독재정권'과 '민주시민' '사이'에서 태어났다. 사회를 변화시킨 역사적 사건들과 분명한 시간적 거리를 두고 있는 이들이 실험하는 것은, 바로 그 '사이'의 언어를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표방하는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차원의 시각"은 양면만 존재하는 납작한 역사가 아니라 다양한 각도의 시선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입체적인 역사인 것이다. 4.3유적 답사와 토론, 역할극과 낭독 등 4.3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했음에도 그 담론이 "모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장윤미 디자이너의 "극락왕생"이 그들의 합의점을 보여준다. "이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가 "아직은 어쩔 수 없이 그러"(전시 서문)한 결론이 아니라 87년생으로 구성된 제0세계를 잘 드러내는 결론이다. 죽음을 넘어선 4.3의 미래를 말 할 수 있고, 살아 남은 사람들의 생명력과 해원 상생의 정신을 주목할 수 있는 세대로 인해 이렇게, 동백꽃이 다시 핀다.


제주4·3의 이해와 교훈

김종민 | 전 국무총리소속 4·3위원회 전문위원

■ 제주4·3, 평화와 인권의 상징

제주4·3사건 때 벌어진 민간인 집단 학살극은 참혹했다. 제주도 개벽 이래 전무후무한 희생이었다. 이는 비록 가난했으나 서로 아끼고 도우며 살아왔던 제주공동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4·3의 상흔은 도민들에게 가슴 속 깊이 낙인처럼 새겨졌고, 풀지 못한 한은 대물림되었다. 국민 대부분은 4·3을 알지 못했고, 설령 조금 알았다 해도 미군정기 분단 상황에서 발생한 제주도만의 돌출적인 사건으로 인식하며 외면해 왔다. 정부는 진상규명과 사과는커녕 사건 발생 40여 년 간 ‘공산폭동론’만을 주장하며 4·3을 입에 담지도 못하게 했다. 

살아남은 제주도민들은 '연좌제'와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등 온갖 치욕과 분노, 좌절과 체념을 겪어야 했다. 4·3학살극은 허무주의와 패배주의를 심어주었고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을 크게 변화·왜곡시켰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은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50여 년 간 외롭게 몸부림쳤다. 또 끈질긴 생명력과 높아진 민주의식을 바탕으로 4·3진상규명운동을 줄기차게 벌였다.

그 결과 2000년 1월 12일 마침내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이 특별법에 따라 국무총리소속 4·3위원회가 구성됨으로써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 작업이 시작됐다. 4·3위원회는 2003년 10월 15일 정부의 공식보고서인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확정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보고서가 채택된 지 보름 여만인 2003년 10월 31일 제주4·3사건을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으로 규정한 보고서 내용을 근거로 유족과 제주도민들에게 머리 숙여 공식 사과했다. 과거사에 대해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을 한 것은 제주4·3사건이 처음이며, 국가 원수가 과거사에 대해 공식 사과한 것도 제주4·3사건이 처음이다. 

이처럼 제주4·3사건은 오늘날까지 제주도민의 공동체 의식과 삶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 '제주 역사의 상징'이며, 제주도민이 주체가 되어 국가차원의 진상규명까지 이끌어 낸 ‘과거사 진상규명운동의 효시’이며,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의 상처를 교훈 삼아 평화와 인권의 정신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평화·인권의 상징'이다.

■ 탄압, 항쟁, 그리고 엄청난 수난(1)

과거 군사정권은 제주4·3사건을 ‘반란’ 또는 ‘공산폭동’으로 규정했다. 반면 시민단체와 학계 일각에서는 ‘항쟁’ 또는 ‘민중항쟁’으로 정의했다. 이와 같이 상반된 인식 차이로 인해 ‘정명(正名)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제주4·3사건을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광주5·18’, ‘4·19’, ‘5·16’과 같은 사건들은 열흘 이내의 비교적 짧은 기간에 벌어졌기 때문에 비록 시각 차이는 있을지언정 각자 가치관과 역사관에 따라 사건을 정의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가령 어떤 이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5·16군사쿠데타’라고 말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5·16혁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제주4·3사건’은 무려 7년 7개월 동안 전개되면서 시기에 따라 여러 국면들이 펼쳐졌다.

해방 직후부터 제주도 밖에서는 치열한 좌·우 이념대립 속에서 1946년 ‘대구 10월  사건’ 등 인명이 희생되는 큰 혼란이 벌어졌다. 그러나 제주도는 미군정청 공보관인 케리 대위가 신년사에서 “육지와 달리 불행한 소요사태가 없었다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제주신보』, 1947. 1. 1.)이라며 감사의 말을 할 정도로 평온했다. 하지만 1947년 3·1절 기념식 때 다른 지방에서 온 응원경찰의 무분별한 발포로 주민 6명이 희생된 사건은 제주도를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 속에 빠뜨렸다. 경찰 발포에 항의해 대대적인 ‘민·관 총파업’이 벌어졌고, 이에 대해 미군정 경찰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규정하며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4·3무장봉기가 벌어질 때까지 1년간 무려 2,500명이 구금되었다. 그 무렵 미군 감찰반이 “제주도 유치장은 최악이다. 3.3평의 한 감방 안에 35명이 갇혀 있다”고 보고할 정도로 유치장은 차고 넘쳤다. 무장봉기 한 달 전인 1948년 3월에는 경찰에 의한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졌다. ‘저항과 탄압의 국면’이었다. 그러자 ‘항쟁의 국면’이 펼쳐졌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경, 오름마다 일제히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이를 신호로 약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내 경찰지서 12곳을 동시에 공격했다. 또한 서북청년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 습격해 살해했다.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조국의 통일독립”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무장대는 5·10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주민들을 산으로 올려 보냈다. 결국 제주도는 3개의 선거구 중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 2곳의 선거가 무산되었다.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의 2개 선거구만이 무효화된 것이다. 그런데 항쟁 못지않게 탄압도 중첩돼 나타난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 탄압, 항쟁, 그리고 엄청난 수난(2)

곧이어 참혹한 ‘수난의 국면’이 전개됐다. 토벌대는 ‘해안선에서 5㎞ 이외의 지대를 적성지역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에 따라 중산간마을을 불태웠고 무차별 학살을 감행하였다. 특히 토벌대가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약 5개월 동안 벌인 이른바 ‘초토화작전’ 때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치른 희생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마을을 포위한 군인들은 다짜고짜 집집마다 불을 붙였고 불기운에 놀라 뛰어나오는 주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요행히 피했다 하더라도 점점 조여 오는 토벌대의 포위망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생사를 건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아낙네들도 어린아이들을 양손에 붙들고 살을 에는 듯한 겨울 한라산으로 향했다. 숨었던 굴이 발각돼 온 가족이 몰살되기도 했고, 구사일생한 사람들은 가족이 총살당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숨죽여 흐느꼈다.

해변마을로 소개(疎開·강제 이주)한 사람들의 희생도 컸다. 토벌대는 가족 중에 한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 하며 수시로 학살했다.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고통의 순간이 짧으니 그나마 괜찮은 경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처참한 광경들이 잇따라 벌어졌다. 해변마을 주민들도 고초를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끼니를 거르면서도 토벌대의 밥상에는 고기반찬과 계란을 올려야 했다. 토벌대는 걸핏하면 ‘무장대 지원 혐의’가 있다며 총질을 했다. 야수로 돌변한 토벌대에 의해 글로는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여성들의 수난도 컸다. 이러한 행위의 책임은 당시 군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여전히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었던 미군에게 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살극이 재연됐다. 도내에서는 이른바 ‘예비검속’으로 1,000명 가량의 목숨이 희생됐고, 또한 불법적인 군사재판을 받아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분산 수감돼 있던 약 2,500명의 제주도민이 인민군에게 쫓기며 패닉상태에 빠져있던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집단학살당했다. 이로써 4·3무장봉기 당시 무장대 숫자는 350명에 불과했으나, 희생자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10 가량인 무려 3만 명에 이르렀다. 중산간마을 대부분이 폐허로 변하는 등 재산피해도 컸고, 육체적·정신적인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7년 7개월간 벌어진 사건의 전개과정은 ‘탄압의 국면’, ‘항쟁의 국면’, 그리고 탄압이나 항쟁이라는 용어를 무색케 하는 엄청난 ‘수난의 국면’이 중첩되면서 차례로 펼쳐졌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이러한 여러 국면 중 하나만을 특정화하여 명칭을 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또한 비록 토벌대에 의한 희생보다 그 비율이 훨씬 작지만, 무장대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엄연히 존재하는 점도 정명 붙이기를 어렵게 하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더 오랜 세월이 흘러 개인사·가족사적인 체험과 기억이 아니라 보다 객관적이고 긴 호흡을 가진 역사의 눈으로 볼 때 비로소 4·3사건에 대해 정명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 “볶은 콩에도 새싹이 나는 법”

4·3사건의 가장 큰 상징은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이다. 4·3희생자 유족들은 복수하지 않았다. 군·경 세력이 위세를 부릴 때에는 복수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유족들은 서로의 상처를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보듬으며 합동위령제를 봉행해 오고 있다. 제주도민들은 더 나아가 ‘평화와 인권’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부각시켰다. 4·3이라는 큰 상처를 입고 반세기 넘도록 쓰라린 가슴앓이를 해 왔으나 서로 위로하면서 평화와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지향해 왔다. 4·3이 ‘평화와 인권’의 상징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4·3사건이 분단의 결과로 빚어졌기에 ‘평화통일’은 당연히 4·3의 한 상징이 될 수밖에 없다. 반상(班常)을 구별하여 신분을 차별하던 봉건시대의 과제는 봉건 타파이며, 일제 강점기의 시대적 과제는 민족해방이라 할 것이다. 남북 분단 상황이 정치·사회는 물론 경제·문화에 이르기까지 큰 규정력을 갖고 있는 이 시대를 ‘분단시대’라고 이름 붙이는 것에 동의한다면, 분단시대의 역사적 사명은 평화통일이다. 따라서 4·3은 평화통일로 가야하는 당위성의 상징이다.

제주4·3사건의 상징 중 또 하나는 ‘저항 정신’이다. 봉건왕조 시절 민란이 벌어질 때마다 ‘장두(狀頭)’가 도민을 대신해 목을 내놓아야 했지만, 제주섬에 대한 외부 세력의 탄압과 착취가 극심할 때마다 도민들은 굴복하지 않고 저항했다. 

‘생명력’도 제주4·3의 또 다른 상징이다. 노형리의 한 자연마을의 주민은 “젊은 남자들이 거의 죽고 나니 축구대회 때 참가할 남자가 정원보다 한 명 부족한 열 명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끼리 ‘죽다 남은 열 명’이라며 자조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도민들은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보면 살게 된다)며 서로 위로했다. 이 때 살아있는 사람만이 유일한 희망의 근거였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생존에 몸부림치며 잿더미로 변해버린 마을을 맨손으로 일구어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어 졸지에 고아가 되었던 한 주민은 “볶은 콩에도 새싹이 나는 법”이라고 말했다.

■ ‘적극적 평화’ 지향해야

4·3사건 때 벌어졌던 야만적 폭력의 근원을 살펴보면, 그 속에는 세계적 수준의 냉전과 남북 분단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4·3사건은 평화·통일·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냉전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살육이 벌어지고 있고, 강대국간 힘겨루기도 결코 끝나지 않았다. 제주도민들은 4·3이라는 엄청난 희생의 후유증을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극복해 왔다. 이젠 남북의 평화는 물론 동북아시아와 나아가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평화·인권의 성지로 가꿔가야 할 것이다. 아시아 평화교육 센터, UN평화대학, 또는 세계적인 인권센터 등 국제적 규모의 평화 관련 기구를 유치하는 등 평화와 인권을 위한 기반시설을 구축하고, 평화지대 선포와 평화교육 의무화 등 프로그램 개발부터 관련 정책이나 법령의 제정까지 다양한 일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제주도는 긴장 상태에 놓여있는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담보해주는 완충지 또는 균형자로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제주도는 지정학적으로 전략적 요충지이다. 이 때문에 고려시대 때에는 일본 정벌을 위한 몽골의 군사기지 역할을 했고,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중반에는 모슬포에 비행장이 건설돼 일본군의 중국 폭격을 위한 기점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3월, 일본은 패색이 짙어지자 미국의 본토 공격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미국의 공격 길목으로 예상되는 제주도에 대해 “최후의 1인까지 싸워 섬을 사수하라”는 이른바 ‘결(決) 7호 작전’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일본군 7만명(조선인 출신 병사와 노무자 1만명 포함)을 배치했고, 제주도 전역을 요새화했다. 실제 미군 전투기가 제주도의 일부 지역을 폭격하기도 하였는데, 일본의 항복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제주도는 오키나와처럼 불바다로 변할 뻔했다. 전략적 요충지인 제주도가 동북아시아의 화약고가 되느냐, 아니면 완충지가 되고 평화의 성지로 기능하느냐 하는 것은 제주도민의 의지에 달려 있다.

정부는 이미 제주도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선포한 바 있다. 이는 4·3의 경험과 교훈이 평화의 토대임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전쟁이나 물리적인 폭력이 없다고 하여 이를 곧 평화라고 말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화해, 상생, 인권이 4·3의 상징이므로 이젠 간접적·구조적 폭력이 없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 즉 소년·소녀 가장, 독거 노인, 어린이, 장애인, 여성, 가난한 사람, 외국인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야만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정글’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세계 평화의 섬’이 될 것이다.

■ 집단광기 속에서도 의로운 바람

제주4·3 때 대량학살이라는 광풍이 몰아치던 가운데에서도 무고한 희생을 막으려 온몸을 던졌던 의로운 사람들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 학살을 막기 위해 힘썼던 독일인 ‘쉰들러’가 있었다면 제주4·3사건 때에는 ‘김익렬 연대장’과 ‘문형순 경찰서장’이 있었다.

* 김익렬 연대장, 평화적 해결 추진
제주4·3 초기, 김익렬 연대장은 강경진압 작전을 벌이라는 미군의 압력과 회유를 받았으나, 사건의 원인은 경찰의 잘못 때문이라는 판단 아래 미군의 요구를 거부했다. 또한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무장대 진영으로 들어가 평화적 해결을 위한 방안을 마련했다. 그러자 조병옥 경무부장은 미군정 수뇌부 앞에서 김익렬 연대장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고 미군정은 경찰의 주장만을 받아들여 김익렬을 전격 해임했다. 나중에 군에 복귀한 김익렬은 중장으로 예편했는데, 그는 제주도를 거쳐간 군 지휘관 중 유일하게 제주4·3의 진상을 밝히는 유고록을 남겼다. 그는 유고록을 쓰게된 이유에 대해 4·3사건에 대한 기록들이 왜곡되고 미군정과 경찰의 실책이 은폐되는데 공분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의 유고록은 4·3의 배경과 진상을 밝히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 문형순 경찰서장, 예비검속자 학살 거부 
제주도내 경찰서는 제주경찰서와 서귀포경찰서 두 곳 뿐이었으나, 1949년에 모슬포경찰서와 성산포경찰서가 신설됨으로써 도내에는 모두 4개의 경찰서가 있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각 경찰서에는 상부의 지령에 따라 무고한 주민들을 예비검속해 학살했다. 대정지역에 있는 ‘백조일손지묘’는 모슬포경찰서에 예비검속됐다가 희생된 사람들의 무덤이다. 제주경찰서와 서귀포경찰서는 예비검속한 사람들을 바다로 싣고나가 수장시켰기 때문에 유족들은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이처럼 경찰서마다 수백 명씩 예비검속돼 희생되었으나 성산포경찰서 관내 지역의 주민들은 8명만 희생되었을 뿐 대부분 목숨을 구했다.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 덕분이었다. 당시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군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 출세를 위해 지원병으로 입대했던 자들이고, 경찰 수뇌부 역시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이에 반해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독립군 출신이었다. 문형순 서장은 예비검속자의 학살을 독촉하는 해병대 정보참모의 명령서에 대해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이라는 글을 써 보내며 대량학살을 거부했다. 문형순은 모슬포경찰서 재직 때에도 무고한 희생을 막아 모슬포에 그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일개 순경의 신분으로도 부유한 집안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커다란 부를 축적한 자들도 많았으나, 청렴했던 문형순 경찰서장은 말년에 제주시내 한 극장의 문지기를 하며 가난에 시달리며 살다 외롭게 숨을 거두었다.